2025년 08월 03일 설교 요약
본문: 마태복음 11장 2-6절, 16-19절 말씀
§ 세례 요한과 예수님 §
오늘 본문에는 바로 그런 깊은 혼란과 의심의 기로에 섰던 한 위대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는 바로 광야에서 외치던 자, 주님의 길을 예비했던 세례 요한입니다. 그는 감옥 가운데에서 예수님을 향해 흔들리는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여러분,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언제나 우리의 생각대로, 계획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대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일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마주하게 됩니다.
바로 이때 우리는 세례 요한처럼 "하나님, 정말 살아계시는 것이 맞습니까? 왜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와 같은 질문을 던지곤 하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부동의 진리는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생각이나 계획을 넘어서는 더 놀라운 일을 이루어가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그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확인 할 수 있습니다. 바라옵기는 우리 성산교회 성도님 여러분 모두가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서 내 생각보다 내 계획보다 더 큰 계획과 역사로 응답하시는 우리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도록 결단하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첫째. 우리가 기대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본문 2-6절 생략.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하시기 직전에 감옥에 갇혔습니다. 헤롯 안티파스가 그를 사해 동쪽의 마케루스 산성에 가둔 것입니다. 요한은 그곳에서 약 1년간 감옥 생활을 하다가 결국 순교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감옥에서, 요한이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됩니다. 소식을 들은 요한은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께 한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요한에게 메시아는 곧 임할 불 심판을 가져올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감옥에서 들려오는 예수님의 사역 소식은 요한의 기대와 달랐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종종 우리의 기대와 계획에 맞는 하나님을 원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때에,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을 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기대를 뛰어넘는 분이시라는 거죠. 중요한 것은 우리의 기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실제적인 역사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보고 들은 것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어떠한 이론이나 추상적인 설명이 아니라 구체적인 변화와 역사를 직관적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식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의심이 들 때마다 우리 삶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하고,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신뢰하며, 하나님의 방식이 우리의 방식보다 높음을 인정하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바라옵기는 우리 성산교회 성도님 여러분 모두가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견고한 믿음으로 서 나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둘째. 세례 요한의 역할은 시대와 시대를 잇는 것이었습니다.
본문 7-15절 생략.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세 가지 질문을 던지시며 요한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설명을 하시는데요. 첫 번째 질문은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요한이 결코 연약하거나 여론에 좌지우지되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시는 것이지요. 요한은 심지가 굳고 듬직하며 단호한 선지자였습니다.
그가 감옥에 갇힌 것도 바로 이러한 확고한 성품 때문이었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입니다. 예수님은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왕궁에서 부드러운 옷을 입은 헤롯 안티파스가 거친 옷을 입은 요한을 가둔 일을 우회적으로 비판하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세 번째 질문은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려더냐"입니다.
요한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400여 년의 침묵을 깨고 온 선지자로 유명했습니다. 사람들이 선지자를 보기 위해 광야를 찾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여기서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요한이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다.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나안에 입성하는 백성을 위해 천사들을 먼저 보내신 것처럼, 요한을 먼저 보내어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없다"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요한은 옛 시대를 마감하며 동시에 새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세상은 온갖 소음과 잡음으로 가득하고, 수많은 목소리들이 우리의 주의를 끌려고 합니다. 미디어는 끊임없이 정보를 쏟아내고, 사회는 다양한 가치관과 이념들로 혼합되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고,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영적 분별력을 키워야 합니다. 사람들이 형성하는 여론에 묻혀버리는 진리를 발굴하고, 세상의 가치관에 휩쓸리지 않는 확고한 신앙의 기준을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바라옵기는 우리 성산교회 성도님 여러분 모두가 오늘 우리 모두가 세례 요한의 신실함과 겸손을 본받아서 세상의 소리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셋째. 지혜는 행함을 통하여서 증명됩니다.
본문 16-19절 생략. 피리를 불며 춤을 추는 것은 당시 결혼식 문화와 연관이 되어 있고, 슬피 울며 가슴을 치는 것은 장례식 문화와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이는 단지 아이들의 놀이가 아니라 인생의 희로애락을 담은 의미 있는 놀이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놀이를 제안해도 함께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복음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응은 자신들의 기대와 편견이라는 틀에 갇혀, 어떤 모습의 진리도 수용하지 않으려는 완고함 그 자체였습니다.
그들은 회개를 촉구하는 엄격한 선지자도,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친근한 메시아도 모두 거부했습니다. 문제는 메시지를 전하는 방식이 아니라, 이미 굳게 닫혀버린 그들의 마음이었지요. 세상이 교회의 스타일과 방식을 비판할 때, 우리는 묵묵히 세례 요한처럼 세상의 죄를 아파하며 회개하는 경건의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세상이 교회의 구별됨을 조롱할 때, 우리는 예수님처럼 기꺼이 죄인의 친구가 되어주고 상처받은 이들을 끌어안는 사랑의 삶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거룩과 긍휼, 우리의 경건과 사랑, 이 양립할 수 없어 보이는 가치들이 우리의 삶 속에서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날 때, 세상은 그 지혜가 참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바라옵기는 우리 성산교회 성도님 여러분 모두가 이 회의적인 세상 속에서 힘차게 울려 퍼지는 가장 강력한 복음의 외침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 강찬웅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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